명예훼손 재판 판결문을 받아보고 나서 -

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진실에 기초하여 대화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서울시립대 성폭력 사건”에서 제가 언급된 부분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들어간 소송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이 사건 당사자 중의 한 명인 저는 여러모로 많은 힘이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생활의 한창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의 절반을 이 문제로 보내야 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무수한 상처를 남겨온 이 법적 분쟁을, 저는 애초에 결코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운동 내의 문제를 사법부에 가져가 판단을 구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억울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파렴치한 성범죄자 취급하는 것을 견디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비판받아야겠지만, 억울하게 덮어쓴 여러 누명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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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소송 끝에 판결문을 받아본 지금, 얼마간은 위안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판결 결과는 저와 상대편 양측이 서로에게 비슷한 금액을 배상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서로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제기한 각자의 주장은 일부 받아들여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저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다음은 판결 내용에서 드러난 것들입니다.


재판부가 판단한 피해호소인 측의 허위사실 주장1. 


"원고[가해지목인 정**]가 이**과 함께 피고[피해호소인 황**]에게 강제로 음란 동영상을 보여 줬다고 하는 것은 허위사실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판결문 인용, 익명처리는 필자)


첫째, 재판부는 제가 해당 사건에서 방조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되나 적극 가담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공개된 처음부터 당시 그 자리에서 제가 이**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을 해 온 바 있고, 또한 그 점을 반성적으로 평가할 부분도 있다고 보아왔습니다. 사건 초기에 이 사건에 관해 공개적으로 발표한 글에서도 말리지 않은 것은 미안하다는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 부분은 반성적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봤고, 그래서 최근 대책위 측에 보낸 메일(판결을 미루고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담긴 편지였습니다)에서도 당일 제가 방조한 사실에 대해서는 돌아볼 점이 있다는 뜻을 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다툼이 생긴 핵심적인 논점은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거나 잘못이 아예 없다는 게 아니라, 바로 피해호소인의 주장처럼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진술은 피해호소인이 틀렸다는 것이고, 그 사실을 과장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 처음부터 저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재판부는 피해호소인에게 부적절한 동영상을 보여준 것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었고, 나아가 그 옆에서 방관한 나에게도 금전적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저도 해당 사건에서 제가 취한 방관에 대한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는, 피해자의 처지에 대한 공감에서 문제를 다루기에 당시의 제기가 제게 너무나도 가혹했었던 것입니다.


재판부가 판단한 피해호소인 측의 허위사실 주장2. 


"원고가 단독으로 또는 이**과 함께 일상적으로 성적인 대화를 하고, 피고에게 직접 성희롱을 하였다거나 섹스에 관한 책을 읽도록 강요하고 성폭력에 대해 침묵하라고 요구하며 "성적 보수주의자"라고 몰아세웠다고 하는 것은 허위사실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 (판결문 인용, 익명표시는 필자)


둘째, 제가 평소에 마초적 행동을 하고 다녔다는 주장과 제가 피해호소인에게 상시적인 성폭력을 저질러 왔다는 것도 틀린 진술로 판명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부분은 피해호소인 측에게 배상책임이 있다고까지 판결이 나왔습니다. 저는 제가 이런 언행을 한적이 없음을 수차례 밝혀왔음에도, 피해호소인이 일방적으로 공개적 주장을 하는 와중에 제 처지를 소명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피해호소인의 심정에 공감하는 일부 사람들은 저에 대해 구체 적으로 아는 바도 없으면서, 제가 위와 같은 사람이라는 주장을 인터넷 공간에서 퍼트리고 다녔습니다. 아무리 제가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재판부라도 제 소명의 합당성을 인정해주어서 다행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재판부는 피해호소인 측의 몇 가지 주장을 기각했습니다. 특히, 피해호소인 측은 원 사건 당시 피해호소인이 동영상 시청에 동의했다는 저의 진술에 대해 거짓에 근거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동영상 시청에 피해호소인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가 없으므로, 허위사실에 입각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또한 나와 피해호소인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한 불미스러운 일을 내가 밝힌 것에 대해서도 피해호소인 측은 내가 허위 사실유포를 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이 역시 "허위사실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정한 해결을 위하여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저는 이번 판결 내용을 통해 그 동안 운동 사회 안에서 제가 완전한 마초쓰레기에 거짓말쟁이로 묘사되었던 것에 대하여 일부나마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찜찜한 점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알고 있었던 바지만, 판결을 받는다고 그 자체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걸 바란 것이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 재판을 통해 피해호소인 측으로부터 큰 금액의 배상을 받을 것을 기대했던 것도 아닙니다. 피해호소인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한, 그리고 피해호소인 측의 문제제기가 계속되는 한, 저에게 역시 이 문제는 완전히 끝난 것이 될 수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판결이 났지만, 여전히 문제는 너무나도 꼬여있습니다. 


따라서 재판 전에도 피해호소인 측에 제안했듯이, 저는 다시금 양측이 대화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재판을 지속할 마음이 없습니다. 평결에 일부 아쉬운 점도 있지만, 더 이상 항소를 할 의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배상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초에 돈을 기대하고 시작한 재판이 아니므로, 판결에 적시된 배상의 의무를 서로 집행하거나 하기보다, 함께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습니다. 즉, 더 이상의 사법적 절차는 서로 중단하고,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만, 이번의 대화는 그래도 좀 더 제 입장을 헤아려주는 대화였으면 합니다. 이제까지 피해호소인 측에서 주장하던 것들 중 일부는, 제가 그 동안 호소해온 대로 저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사실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재판 판결을 통해서도 그런 제 주장이 설득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 호소인 측에서 이런 점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주신다면, 저도 그 사건에서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비판적으로 또한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제가 모두 잘했고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전후해 만나본 많은 여성주의자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나 반성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여성주의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평가와 진지한 반성을 위해서라도, 성폭력 사건에서 마녀사냥이나 일방적 매도가 아니라, 진지하게 양측의 입장에 대해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는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은 상호 간에 생긴 상처와 불신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주앉아 얼굴을 보고 진정성 있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 특히 여성주의적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나에게 조언과 질책을 아끼지 않았던 동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받았던 상처가 너무나도 컸고, 다시 돌아보기에 끔찍한 몇 년이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고민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부디 이 판결을 계기로, 오랜 사건이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될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되길 기대해봅니다.


2014년 11월 5일 정**


덧) 이 글은 제가 지난 2월 탈퇴한 "노동자연대"나 제가 그 후 몇 개월간 몸담았던 어떤 모임, 그리고 그 외 저를 도와주었던 여러 분들이 가진 각자의 입장과 무관하게 작성되었습니다. 즉, 이 글은 오롯이 저와 현재 대리인(이서영)이 서로 상의한 결과로 쓰여진 것입니다. 향후 이 사건에 관련되어 다른 개인이나 단체들이 어떤 입장을 발표하더라도, 이는 당사자인 제 의사와는 무관함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Posted by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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